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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보고 듣고 쓰고

책, 사피엔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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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크리스마스 전이니까 몇 달 전이었을 것으로 기억이 된다. 

페이스북 뉴스피드 페이지를 훑어 보고 있었다. 

친구의 포스팅이었는지 어떤 언론사의 책 소개 기사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신을 창조했다는 주장이 담겼다는 구문이 특히 눈에 들어오면서 책 "사피엔스"가 읽어 볼 목록에 추가 되었다.

일을 그만 두고 간 여행 중에 읽으려고 전자 책을 사 두었지만, 밤에는 피곤해 자느라 여행에서 돌아 온 뒤 열흘에 걸쳐 읽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능력으로 신을 창조했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는 가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실제로 책을 읽을 때도 곱씹고 생각하고 소화하려고 하기 보다는 빨리 그 부분을 찾고자 속도를 내어 읽으려고 애썼다.

읽다보니 그렇게 가볍게 읽을 책이 아닌 엄청난 자료 조사와 연구, 깊은 사유가 담긴 책이라 적잖히 놀라긴 했지만 말이다.


그것이 왜 궁금 했을까?

이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10대 때부터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의 흐름 그리고 풀리지 않을 의문점들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이 글을 쓰는 이유이다. 

뭔가 정리해 두고 싶어서.


나에게는 어렸을 때부터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었다.


"지구상의 동물이나 곤충들은 그저 본능과 생존법칙에 따라서 자연 있는 그대로 살다가 죽는다. 

인간도 이 지구상에서 한 종의 동물일 뿐인데 왜 인간은 더 돈을 많이 벌지 못 해서, 더 많은 권력을 갖지 못해서 아등바등 하며 살아갈까? 

왜 인간은 지구에 오염을 일으키는 존재가 되었을까? 왜 같은 종끼리 죽고 죽이는 전쟁을 할까? 왜 이렇게 거만할까? 

왜? 지능이 높아서? 

정말 신이 존재 할까? 정말 신이 인간을 사랑해서 이렇게 다른 생명체들과 다른 존재로 만들었을까?"


매달 생리 증후군을 꽤 심하게 격는 편이다. 

몸 상태에 따라 심한 정도가 다르기도 하지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짜증이나고 기분이 우울해져서 2~3일은 울어야 하고, 주기에 따라서 배가 불러도 먹을 것을 입으로 구겨넣는 식탐이 이어진다.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는 이런 심리적 혹은 욕구 변화는 매번 경험해도 적응되지 않는 불편한 것들이다.

이 모든 건 호르몬이라는 몸속의 물질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정말 신이 이런 호르몬까지 만들었을까?"

사실 이럴 때 나는 내 자신이 신이 만든 대단한 피조물이기 보다 동물이라고 느껴진다.


나는 신을 믿는다고 말할 수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도 없었다.

믿지 않는다고 하자니 정말 보이지 않는 강력한 어떤 힘이 있을지 모르는 일이 아닐까 싶고, 믿는다고 하자니 없는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종교도 없는 나의 입장을 굳이 정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다만 내가 인간으로서 살면서 할 수 있는 걸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타인을 존중하고, 성장하는 사람으로 사는 것!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깨달았다.

과연, 어떤 증거가 있다고 하여 내가 신을 눈으로 보기 전에 그것을 믿을 수 있을까?

"신이 존재할까?" 에 대해서는 알 수 없겠다는 결론이다.

어쩌면 그냥 그건 내 결정에 달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믿으면 신이 존재하는 세상에 사는 것이고, 믿지 않으면 신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사는 것.

여전히 난 결정을 내릴 수 없을 것 같다.

어떨 때는 없는 것 같기도 하고 어떨 때는 있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종교를 가질 뜻이 전혀 없다.

종교는 삶을 사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것이 신 자체에 대한 신념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런 시점에서 작가가 제시한 "종교는 인간의 규범가 가치의 체계"라는 의견에도 동의한다.


한국 역사도 5000년은 된다고 하는데 왜 내가 유대인의 역사책을 믿고 공부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그렇게 따지면 환인 환웅에 대한 것도 연구할 가치가 있는 거 아닌가?

인간의 문화가 지역마다 인종마다 모두 다르 듯이, 같은 의미를 서로 다른 언어로 전달하 듯이 결국에는 서로 다른 종교도 같은 신을 바라보는 건 아닐까?

태초에 우리가 서로 다른 신에게서 태어난 같은 종류의 피조물이 아니라면. (오, 이것도 모를 일이군)


한 가지 의문은 해결이 되었다.

같이 사는 기독교인 친구들이 악마에 대해서 말할 때마다 하나님이 유일신이라고 말하면서 도대체 악마의 존재를 왜 믿는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건 이신론의 개념에서 온 거라는 것이었다.

종교는 인간의 산물이니까 시간이 흐르면서 그렇게 받아들여진거구나!, 했다.


내가 이 책을 읽기 시작한 이유, 즉 신이 있을까에 대해 결정을 내릴 수 있는 타당한 실마리를 얻을 수는 없었지만, 생물학적, 역사학적 시선으로 접근하여 인류의 역사 전반을 설명하는 작가의 주장은 나에게 꽤 설득력이 있었다.


호모 속에 속하는 사피엔스는 인간종의 한 DNA 변이로 출현하여 조금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할 수 있게되었다는 것이다.

그 언어 체계는 허구를 생산하고 그 허구를 사피엔스는 실존하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허구를 믿는 것이 일으킨 엄청난 역사, 사회적, 생태계 변화들이 이 한 권의 책에 아주 잘 녹아 있었다.


한국을 떠나 지내면서 다양성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게 되었다.

어떤 낯선 도시를 돌아다니면서 나는 문득 내가 아주 불편한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뭔가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영국의 거리들이었다.

서로 다른 모습을 한 펍, 상점, 수퍼마켓, 아주 작은 악세사리가게들.

'와... 여기는 사람도 없어 보이는데 장사가 될까?'

그러다가 화들짝 놀라게 되었는데 그런 불편한 감정들은 내가 한국에서 익숙해진 프렌차이즈 상점들에 익숙해 져 있었다는 방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편의점, 커피숍, 떡볶이집, 빵집 모두 똑같은 상호명을 한 가게를 곳곳에서 볼 수 있었는데 뭔가 정돈되지 않고 일관성이 없어보이는 영국의 거리들을 보고 물품이나 서비스의 질에 대해서도 의심을 하고 있었다.

사실은 그런 작고 개성있는 상점들이 많이 있고 잘 되어야, 그런 다양성이 많이 많이 발전하고 활성화 되어야 우리나가 경제에도 이익이 되는데 말이다. 

내 의식은 그 와 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이런 다양성을 전 지구적으로 확장 했을 때, 모든 민족 문화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고 가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크고 작은 변화들이 끊임없이 일어나서 형성된 다양성.

이렇게 다양성에 대한 관점을 취해보니, 인류가 파괴한 생태계의 다양성에 대해서 굉장히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사피엔스 등장과 함께 메머드와 같은 거대 포유류 종은 사라졌고, 지금 남아 있는 생명체 종은 몇 만년전에 비하면 큰 게 줄어들어 있었다.

나는 현존하는 생물체의 다양성도 정말 너무나 엄청나고 많다고 생각했는데 그보다 훨씬 더 많았다니 정말 이 지구라는 행성에 대해 놀라울 따름이다.

단세포 생물로 시작되어 그렇게 엄청나게 다양한 생명체들이 생겼다니 이것 또한 변이, 교배의 다양성에서 왔을 것이다.

나는 "DNA 변이로 인해 우리가 다른 동물들과 다른 언어체계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고, 그 언어 체계는 허구를 창조 할 수 있게 하였고, 인간은 그 허구를 믿을 수 있게 되었다"는 주장을 이 다양성의 관점으로 바라보았고, 받아들일 수 있었다.

(DNA 변이는 신이 일이켰을까? 하고 여전히 깨알같이 치고 나오는 의문...)


나에게 충격적인 것은 평등과 자유 또한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다는 것이다.

와우!!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모든 개인은 다른 사람을 해하지 않는 범위에서 자유 의지를 누릴 권리가 있고 그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저자의 관점에 따르면 이것 또한 허구이다.

동의한다.


이런 인지혁명 외에 책은 농업혁명, 과학혁명, 자본, 화폐, 종교, 제국 등에 대해서 아주 방대한 역사를 모두 다룬다.

내 의문인 인간이 아등바등 살게 된 이유는 농업혁명이라는 대 사기극 때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밀 따위라고 말하기엔 넘 맛있는 그 곡물에 길들여진 결과였다.


또한, 생물학적 종의 성공이 각 개체의 행복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

사피엔스, 닭, 소, 돼지는 지구상에 생물학적으로 개체수가 지배적으로 많다. 

그렇지만 우리에 갖혀 새끼와 분리되어 우유를 생상하는 젖통 역할만 하는 소는 불행하다.

저자의 관점은 인간에만 국한 되지 않았다. 마치 '내가 소라면...' 이라고 생각해 본 것 같았다.

인간도 마찬가지 이다.

전대 미문의 폭발적 숫자의 인구수를 기록하고 있지만 개인의 행복도를 수렵채집인의 그것과 비교해서 더 낫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


지구를 눈 앞에 놓고 우주에서 몇 만년동안 돋보기로 관찰 해 온 것 같은 느낌이드는 책이다.

그럼에도 각 개체를 감정을 가진 생명체로 여기면서 그들의 관점으로 행복할까라는 의문을 던진 것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앞으로 인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저자는 과학과 기술이 주는 엄청난 능력은 한계가 없고 그것을 사용하는 인류에게 불가능이 없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설득당했다.

두렵지만 말이다.


가장 마지막에 그는 이런 질문을 남겼다. 

"우리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이 한 문장에 얼마나 깊은 통찰을 담고 있는가!!!!


인류는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

불가능 없는 능력을 가진 인류가 진정으로 다 같이 고민해 봐야할 문제가 확실하다.

자칫, 어떤 소수집단의 광기로 전 인류는 충분히 멸절될 가능성이 있으니까 말이다.

이런 진지한 고민들이 우리의 방향을 결정할 것이다.


정말로 모두가 "함께" 행복하고 싶은가?

과학은 자본이 필요하고 자본은 가진자들의 의지에 따라 움직이다.

힘이 있는 자들이라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더욱더 깊은 철학과 인간적 고민을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류는 개인, 국가를 떠나서 전 우주적인 관점으로 모든 것을 고민하고 다음 세대를 교육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각 개인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회를 고려하여 스스로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부터 시작해야 되지 않을까 싶다.


신에 대한 의문은 접어 두어야겠다.

그냥 난 한 인간으로서 가까운 사람들을 아끼고, 

그들과의 갈등을 존중과 대화로 해결하며 매일매일 사랑을 키워나가면서 그저 내 삶을 살고싶다.

이것은 쟁취해야 하는 것이 될 수가 있다는 것도 안다.

누군가가 모든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이런 소소한 일상조차 나에게 허용되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이 역사적으로 증명되었으니까.

ㅇㅏ... 이쯤에서 역사와 정치에 대해 더 많이 관심을 갖고 알아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다.

괜찮은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책임감-.


내가 누리는 자유와 소소한 일상을 소중히 여기자.

나는 내일 무엇을 원하고 싶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