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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그리지 못 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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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수요일이나 목요일 즘으로 기억한다.

토요일에 대전에 올 일이 생겼는데 볼 수 있냐는 것이었다.

시간이 늦은 때였고, 어지러움증이 너무 심했을 때라 대화를 다시 하기로 하고 잠들었다. 

나는 내가 해야하는 것들에 대해 체계적으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 그때 닥치는 것들에 대처하기 바쁜나를 보고 두려운 마음이 들었다.

그냥 몸도 마음도 정돈 되지 않았다.

토요일에 만나기로 했으면 금요일에는 최소한 대화를 했어야하는데, 그 작은 것에 대한 계획도 떠오르지가 않았다.

토요일에 급히 연락해서 씸이 서울로 돌아가기 전에 얼굴을 봤다.

고맙게도 집 근처까지 와 주었다.


이런 저런 근황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씸네 이사님이 나에 대해 받은 인상에 대해서 전해 들었다.

나는 호기심이 너무 많고,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빠져드는 고집이 있다며 씸이, 

아니 그 누구라도 옆에서 아무리 이런 저런 얘기를 해 줘도 들을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다고 쳐도, 자리가 있을 때 나를 고용할 생각이 있으신지 물었다고 했을 때

"수정이가 들어와서 일 하고, 사람들이랑 어울리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이 없지만 한 가지 고민이 되는 것은

내가 목표를 정해 줄 수는 없다."

라고 말씀 하셨다고 했다.

단 몇시간의 만남속의 대화 안에서 나를 참 잘도 파악하셨다.

깜짝 놀랍고 조금 민망할 정도로.

안 그래도 지금 어디든 들어간들 일하면서 느낄 공허함을 내가 채울 수 있을까, 

예전 회사 다닐 때의 나와 무엇이 다를 것인가 하는 생각을 하던 차였기 때문이다.


씸과 대화를 나누면서 깨달은 게 있다.

나는 지금 약해진 내 건강과 집중력 때문에 두려움을 가지고 있고,

그 두려움들로 내가 조금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들을 실행으로 이어나가는 것에 대한 의미조차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내가 지금, 허무함과 싸우고 있다고 입밖으로 내 뱉는 순간 혼란스러웠던 것이 조금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대화를 하게 된 기회가 정말로 감사하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허무와 싸우고 있다.

목표를 설정해야 바라보고 갈텐데, 무슨 목표를 세워야 할지, 목표를 세우고 싶지 않고, 생각하고 싶지 않고, 애쓰고 싶지 않은 상태.

돌아보니 중학교 때부터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사람은 왜 태어나서 무엇을 위해서 살까?

좋은 집, 먹을 것, 좋은 차, 좋은 직장을 위해서 살다가 죽으면 행복할까? 어차피 끝날 거 왜 크나큰 고통을 감내 해야 할까? 

(그 때 내 기준에서 삶은 내 부모였다. 특히 엄마.)

공부만하면 되는 대학생 때도 한 친구에게 이런 말도 한 적이 있다.

다 무의미하게 느껴지는데 살기는 열심히 살아야하는 현실을 무겁게 느끼고 있었다.

"사람은 왜 먹고 살아야 할까? 먹지 않고 입지 않고도 살수 있다면 덜 힘들지 않을까?"

그때는 가까워졌다고 믿었던 친구였지만 뜬금없는 생각때문인지 내 생각에 맞장구도 치지 못했다.

"너 왜 그래~"

그 이후로 내가 느끼는 공허함이 입밖으로 쉽게 나오지는 못 했던 것 같다.


현실에 떠밀려, 때 되면 시험봐서 학교 가고(부모님의 희생이 있어 가능했지만), 때 되면 취직해서 일 하고... 

잘 사는 거라 말할 수는 없었지만 열심히 산 줄 알았는데 허무하다.

다시 무난한 무엇인가를 시작하는 것이 나를 어딘가에 구겨넣는 것 같이 불편한 느낌이다.


영국에 가기 전에는 막연하게 품고 있었던 기대, '다른 문화권에서 일상을 살아본다'가 어쨌거나 경험되었다고 생각되는 순간부터 

사실 허무했다.

그 다음에 나는 무엇을 그리고 싶은지 그려지지 않았다.

전문가 되기... 정말? 왜?

내가 그리면 그것이 다시 청사진이 되겠지만, 그냥 길을 잃은 기분이다.

그렇지만, 나는 나를 책임져야 하고, 온전히 독립해서 살아야 하는데 이런 고민에 빠져 있는 내가 한심하고

그것을 들킬까봐 말을 아끼게 되었다.

내가 하는 고민들은 정말 쓸 데가 없는 걸까?

나는 왜 유독 혼자 이런 고민을 하고 앉았는 걸까?

나는 게을러서, 일 하기 싫어서, 힘든 게 싫어서 이러고 있나?

힘든 게 두렵기는 하지만, 내가 가치를 느끼면 못 할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데...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한 가지 분별을 통해 본 것은 있다.

"허무하다"를 나는 무로 생각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허무하다"에 가치 없다는 의미를 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가치 없다는 의미 속에 있으면 무엇이든 잡고 싶은 생각이 안 드는 게 자연스럽지 않은가?

나는 다른 의미를 창조하거나 그냥 없음으로 다시 바라봐야 할 듯 하다.


그리고,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보고 있는 듯 했으면서도, 직시하지 않은 것이 한 가지 있는데 내 가슴에, 

땅에 박혀 굵게 불쑥 툭튀어나온 나무기둥 같은 화의 기둥이 있다는 것이다.

그 화가 자꾸 욱 하고 올라와서 다른 사람들 말이 고깝게 들렸다.

때로는 쓸 데 없는 데서 그 욱 하는 화를 꺼내들고 다른 사람을 저 멀리 밀어냈다.

특히, 설에 선주언니와 대화 할 때, 선하고 자유롭게 자기 삶을 나누는 언니에게 거리를 두었던 내가 보였다.

요상한 심보다 정말.


그러던 와중에 전에 주문해 둔 책, 열한계단을 읽게 되었다.

가끔, 삶은 원하는 것을 준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여덟번째 계단 삶에 대한 수용과 아홉번째 계단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지금 나를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열한계단까지 읽어 가면서 조금은 안정되었다.

단기 목표는 세워졌다.

건강하고 단단해지고 활기를 되찾기.

생활 습관부터 다시 점검해 보고 실천해 보자는 것.

뇌가 멈추는 기분이 든다는 것은 한의사로부터 체력이 돌아오면 해결될 문제들이라는 조언을 듣고 난 뒤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너무 늦어지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기는 하지만,

다시 힘을 내 보는 걸로.


살아 보는 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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